-----------------8편------------------
우습게도 마지막 시합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승리의 여신은 선배에게 미소를 보내었다.
김정만은 똥 씹은 표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한마리도 못잡았고, 그 억울함과 분통함이 얼굴에 그대로 뭍어나 있었다.
그동안 무표정으로 일관하였던 그가 12시가 되고, 시합이 끝나자
노골적으로 안좋은 인상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이길것이라고 생각했던 김정만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간 셈이다.
츄리닝의 사내도 이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츄리닝 사내의 입이 닫힌것 처럼, 시합도 그렇게 끝이 막이 내려졌다.
돌아 오는 길에 나 역시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웃는 모습조차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잘못 말을 했다가는 싸움이 날지도 모르는 그런 분위기 였다.
속으로는 신이나서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선배도 마찬가지일것이나, 선배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대해서 걱정을 하는듯 했다.
'용왕님 놓아 주는김에 다 놓아 줍시다'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궁금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 오는 길까지가 너무도 길게 느껴 졌다.
숙소에 있는 영호는 우리가 들어 가자,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처럼 우릴 바라 보았다.
난 자그마하게
-이겼어~
하며 큰소리로 '우하하하하' 하고 웃어 버렸다.
올마나 참았던 웃음이던가.
너무도 신이 났고 날아 갈듯이 기뻣다.
-선배님 이거 세금 내는돈 아니죠? 이거 어디다가 쓸꺼에요?
선배는 그말에
'좋은일 한번 할란다.'
라는 말을 했다.
-불우이웃이라도 돕게요?
'그래 그러자'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다.
까짖꺼 백만원정도를 불우이웃 돕기 성금에 낸다 해도 그 무엇이 아까우리오.
그 몇일간 우린 1600만원이라는 돈을 움켜 지게 되었는데, 까짖 백만원쯤..
하지만 천만원을 아직 받지 않았다.
원래는 선장이 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선장이 우릴 포인트까지 데려다 준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배님 돈받으러 가야죠~
'가지고 오겠지 뭐 설마 안주겠어?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
-그렇겠죠. 그래도 받으러 가는것이 안나을까요?
'아니다 가지고 올꺼야. 어쩌면 내일 줄지도 모르겠구나.
추자도의 바람이 우릴 놓아 준다면 내일 철수를 할수있다.
한시라도 빨리 추자를 벗어 나고 싶었다.
예전에 추자도에서 주위보 때문에 혼자 10일간을 낚시도 못하고 있어본적이 있었다.
그래도 추자도는 피씨방이 있기때문에 무료 하지 않게 보낼수 있었지만
정말 못할 짖이다. 나중에는 동네 아이들이 인사까지 한다.
10일을 피씨방에서 살았으니 인사를 받을만도 했다.
그때는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우린 저녁에 명식이가 가져온 농어 한마리로 소주를 한잔 했고,
내일 육지로 나가서 선배에게 릴과 몇가지를 선물 받을생각을 하니 맘이 부풀어 올랐다.
추자도의 항구에는 언제나 낚시 꾼들로 붐비고 있었다.
낚시를 하러 들어 오는 사람들 나가는 사람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조황에 대해서 물어 보기도 하고,
짐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린 봉고차로 가져온 짐을 배 들어오는 입구에다가 가지런히 정렬을 해놓았다.
정리를 하는중에 선배가 갑자기
'저기 온다 천만원~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선배의 시선에 내 눈을 맞추었다.
저쪽에서는 다방 아가씨인 서희가 이족으로 오고 있었다.
서희라는 애를 시켜서 돈을 주는구나 라고 생각을 할때쯤이었다
'참아 가서 표한장 더 끈어 와라'
-엥? 왜요? 누구 같이 나갈사람 있어요?
'서희랑 같이 간다.'
-네? 그게 뭔 소리에요?
'천만원 대신에 서희를 데려가기로 했다.'
어허 이게 뭔 추자도 감성돔 하품 하는 소리인가 말인가?
영호와 난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봐라 돈을 천만원을 받는다면 김정만은 무슨 이유는 달아서라도 또 내기를 하자고 했을 것이다.
아래께 다방에서 이야기를 할때, 내가 지면 당신에게 천만원을 줄것이고,
내가 이긴다면 서희라는 애를 내가 데려 가겠다고 했다.
그러니 김정만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그렇게 하자고 하더라.
만약에 돈을 또 딴다면 우리가 그냥 추자도를 빠져 나갈것 같으냐?'
선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서희를 데려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새장가라도 들겠다는 소리인가?
선배는 말을 이었다.
'좋은 일 한번 하자. 서희를 집에 데려다 주자. 자유를 주자는 말이다.'
그렇다 선배는 어제 '용왕님 보내주는 김에 다 보내줍시다' 라는 말뜻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선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서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난 선배가 너무도 크게 보였다.
옆에 있는 영호와 명식이는 박수까지 치면서, 선배의 말에 감탄을 하였다.
주의에 몇몇의 남자들은 우리를 손가락질 하며 수근덕 거렸다.
선배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집이 어디에요?'
'광주에요'
서희는 나즈막하게 말을 했다.
서희는 다 알고 온것 같았다.
'너무 고마워요. 은혜 꼭 갚을께요.'
서희의 눈에는 어느새 한움큼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님니다. 학생이라고 했죠? 집에 가서 이제 맘잡고 열심히 공부 하고, 좋은데 시집 가야죠.
그래도 몇일 안됐으니 참 다행입니다.'
선배는 그렇게 말을 이었다.
하긴 선배가 돈을 주고 데려온것은 아니었다.
시합에서 그저 낚시 시합에서 고기 한마리 잡아서 서희를 놓아 준다는것이다.
그렇다 그 돈을 우리가 가져 와도 그 돈으로 인생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선배가 한일은 서희 라는 여자의 인생을 바꾸고 있는것이다.
우리가 추자도에 들어올때 처럼 그렇게 서희는 창문밖을 바라보며 온바다호에
몸을 의지 한체 창밖을 바라 보고 있었다.
얌전한 아가씨 였다. 서희에 눈에는 눈물이 맷혀 있었고, 선배에게 계속 고맙다는 말을 했다.
영호와 난 선배를 우러러 보았다.
새롭게 선배를 보게 되었다.
술한잔 하면 시끄럽게 떠들고 노래를 부르던 선배 아니던가?
하지만 이렇게 속이 깊을줄은 몰랐던 것이다.
완도 항에 도착한 시간은 낮 한시가 다 되어서 였다.
우린 짐을 차에 정리를 하고, 광주로 향했다.
차안에서 서희의 말을 듣고는 가슴이 뭉클 하였다.
서희는 올해 22살의 졸업반 대학생이다.
아버지는 3년전 돌아 가시고, 어머니가 대학 등록금을 데주어야 하는 형편이 되었지만
서희의 어머니도 1년정도 파출부 생활을 하다가, 교통 사고로 인해서,
병원 신세를 지었고, 퇴원 후에는 합병증으로 디스크까지 오게 되서 침대 신세만 지고 있었다고 했다.
서희의 카드값은 생활비와 서희의 등록금을 내는곳에 쓰다가, 은행의 압박이 오자
순진한 아가씨는 대출받는 곳에가서, 천만원을 빌렸던 것이다.
이자에 이자가 부풀어 올라 결국에는
추자도 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아르바이트도 해보았지만 아르바이트 가지고는 생활비와 등록금을 내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돈이 었다.
서희는 어머니가 걱정 된다며 울먹이고 있었다.
우린 그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도 가슴이 아펏다.
그렇게 서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광주 계림동 주택단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희는 집을 가르키며 자기네 집앞이라고 했고, 우린 그 집앞에 조용히 차를 주차 시키고,
서희를 어머니의 품으로 다시 돌려 보내고 있었다.
선배는 언제 준비 했는지 돈 봉투를 서희에게 주었고, 서희는 받지 않으려 했지만
선배의 강력함에 마지 못해 돈을 받았다.
집에 들어 와서 차한잔을 대접 하겠다는 서희를 뒤로 하고 우린 바로 차에 올랐다.
서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때 까지 서희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그렇게 서희와의 인연을 끝을 내었다.
부산으로 돌아 오는중, 난 너무도 가슴이 뿌듯 했다.
영호 역시도 기분이 좋다며, 그동안의 삶을 다시 돌아 보게 한다고 하였고.
선배 역시도 머리털 나고 이렇게 보람된 일을 한적이 없다며 자신을 대견해 했다.
부산의 봄은 이제 완연히 찾아 와 있었고,
서부산 톨게이트에 대문짝 만하게 써있는 '부 산' 이라는
글씨가 너무도 반가워 보였다.
몇일이 지난 시간 이었지만, 일년정도의 시간이 흐른것 같았다.
그렇게 부산은 우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가슴속 저쪽에서 뿌듯함이 복받쳐 올라왔다.
추자도를 다녀 온지도 벌서 10일이 흐르고 있었다.
인터넷을 자주 쳐다 보는 영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이번에 낚시 대회가 있다는데요. 일본 조구 업체에서
한국낚시꾼들을 상대로 대회를 한담니다. 3등까지 입상을 하게 되면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자격이 주어 진다고 하네요.'
-그래? 그럼 삼이형 한테 연락 해서 우리 셋이 참가 하도록 하자 언제 한다고 하니?
'앞으로 한 20여일 남았어요. 장소는 아직 미정이랍니다.'
-그래 그럴것이다. 원래 장소는 그날 당일 알려 주던가, 그런다. 상금은 얼마라고 하니?
'상금은 1등이 천만원 이구요. 2등이 오백만원 3등이 삼백 이랍니다.
-3등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난 바로 인터넷에서 그 홈페이지를 찾아가 대회 규칙 등등을 보았다.
대상어종은 감성돔 이라고 하는데 지금 시즌이 알감성돔들이 나오게 때문에
살아 있는 감성돔만을 대회규정에서 인정 하며, 잡은고기는 놓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 진다고 한다.
부정고기를 막은 일환이기도 했다.
아마도 녹동이나, 나로도 내만에서 이루어 질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지금 이시즌이라면 내만권에 알감성돔 들이 붙을때가 되었고, 씨알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다시 놓아 준다는 규칙이 맘에 들었다.
현재 불법 어업선이 엄청나게 감성돔 등을 잡아 내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낚시 꾼들이 잡은 고기를 놓아 준다는것은 그들에게도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세명은 참가 신청서를 내었으며, 그 다음날 바로 입금을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꼭 입상권 안에 들어 보리라는 대단한 각오와 함께 매일 매일 낚시대를 쳐다보며
부푼 가슴을 달래보고 있었다.
일을 마친후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저녁에 심심하니 남천동 방파제에서 잡어나 잡자고 전화를 했다.
선배가 낚시를 마다 할 사람이 아니다.
두어 시간후 우린 남천동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이 드신 어르신들과 아빠의 손을 잡고 나온 초등 학생까지 많은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망상어나 전갱이등이 심심치 않게 잔 손맛을 선사 해주었다.
우린 잡는 족족 옆에 계신 어르신의 살림망에 고기를 넣어 주었다.
어르신은 '고맙네 젊은이들' 하며 환한 미소를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광안대교에 다리를 장식한는 조명등이 켜졌고, 그 광경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쳐다 보고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웠다. 대교위를 시끄럽게 달리는 차소리가 그 조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바다 한가운데서에 차소리는 그저 시끄러운 공해 소리와도 같았다.
그래도 행복 했다. 지금 바다가 내앞에 펼쳐져 있지 않은가.
-선배님 이제 들어 가시죠.
긴 하품을 하는선배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린 낚시대를 접으며 옆에 있던 어르신께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참으로 기분 좋은 풍경속에 낚시 였다. 부산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하다.
걸어서, 그리고 차를 타고 조금만 가면 언제든지 바다를 만날수 있고, 민장대 라도 한개 들고 가면
잔 손맛을 볼수 있는곳이 여러곳이 있기 때문이다.
3년전 부산으로 이사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부산에 일이 있어, 해운대 리베라 호텔에 묵으면서 시간을 쪼개어 다대포로 혼자 출조를 간적이 있다.
동네 낚시터라 여기고 그저 우습게 생각을 했던 내가 잘못 이었다.
포인트로 나간곳은 나무섬 사각여 였다.
몇몇의 낚시꾼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고, 물은 잘 가는 편이 었다.
동이 트자 크릴 한마리끼워서 성의 없이 바다로 던졌다.
난 그저 망상어나 잡어들이 입질을 할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두번재 캐스팅에
찌는 고요히 흘러 가다가 갑작스레 자취를 감추었다.
쉬익~!
핑핑핑~~~
'헉'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것은 대단한 힘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줄이 한방에 나가 버렸다.
옆에 있던 낚시꾼은 나를 멍청한듯 쳐다 보았다.
내자신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보였다.
어이가 없었다. 동네 낚시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것이다.
목줄을 1.5호를 썻던 내가 잘못이 었다.
두번째는 바늘이 벗겨져 버렸고 세번째는 급한마음에 대강 메어놓은 바늘이 빠져 버렸다.
정말 기가막힌 노릇이었다. 이건 어디가서도 창피해서 말도 못하는 소리 였다.
네번째 입질을 받아 고기를 확인 하니, 48센티짜리 감성돔 이었다.
그럼 그동안 5짜에 가까운 감성돔 3마리를 놓친것이다.
그게 중요한것이 아니다.
감성돔이 4마리가 됐던 1마리가 됐던간에 난 다대포를 택시를 타고와서 낚시를 한것이다.
서울에서 그런 감성돔을 구경 하려면, 날짜 잡고 힘들게 바다로 나가서 새벽에 덜덜 떨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6시간식 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들어 와야 하는 그런 힘든 낚시를 해야만 겨우 감성돔 얼굴을 볼까 말까 한데,
이곳 부산은 택시를 타고 조금만 가니, 감성돔 얼굴을 볼수 있다는것이 너무도 신기 했다.
부산꾼들이 그렇게 행복하게 보일수 없었다. 동네에서 도보로 낚시 할곳에 갈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이란 말인가?
선배와 나 그리고 영호도 대회를 앞두고 일상생활에 매진 했다.
대회 까지는 20일 정도가 남았다. 그동안 우린 봄 감성돔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인터넷도 뒤져보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가고, 대회날자는 이제 2~3일 여 앞으로 다가 왔다.
----------------------------9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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